▲ 경기도 화성 청원산단에 있는 에너진 본사 전경.

[월간수소경제 성재경 기자] ‘재야의 고수가 떴다.’ 경기도 화성의 청원산단에 있는 에너진(ENERGYN)을 나서며 든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에너진은 수소업계에 이름이 알려진 회사가 아니다. 국내외 기업이나 연구소를 상대로 HIP, CIP 같은 초고압 장비를 제작해온 기술회사라 그동안 대중 앞에 나설 일이 없었다.  

에너진을 처음 접한 건 4월 초였다. 국토교통부 공모로 추진하는 ‘해외 수소기반 대중교통 인프라 기술개발’ 사업에 한국가스기술공사, 광신기계공업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여기서 해외는 아랍에미리트(UAE)이다. 재생에너지와 연계한 수전해로 시간당 35kg이 넘는 수소를 생산해서 수소버스에 충전하는 설비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2024년에는 UAE 현지에 설비를 구축해 실증에 나서게 된다. 

CO2 냉매 적용한 수출용 냉각기 개발

에너진은 이번 공모사업에서 칠러(Chiller)라 부르는 냉각기의 개발을 맡았다. 여기에 충전기와 붙어서 가는 프리쿨러(Precooler)라는 열교환기 제품을 함께 공급하게 된다. 영하 40℃의 온도로 수소를 충전하는 데 꼭 필요한 설비들이다. 

“국내에 냉각기를 만드는 회사는 많습니다. 한데 대부분 프레온가스를 냉매로 써요. 우리나라는 아직 제재를 하지 않아서 가격이 저렴한 프레온가스 냉각기를 쓰고 있죠. 이 제품은 해외로 수출할 때 문제가 돼요. 일본이나 유럽만 하더라도 대기환경에 무해한 CO2 냉매를 주로 쓰죠. 그래서 이번에 CO2 냉매를 쓰는 칠러를 협력업체와 함께 개발하게 됩니다.”

에너진 황인기 전무의 말이다. 

▲ 국내 초고압 기술 발전에 초석을 다진 에너진의 황인기 전무.

차세대 열교환기 기술은 이미 확보했다. 에너진의 열교환기는 확산접합 기술이 적용된 ‘인쇄회로 기판형 열교환기(PCHE; Printed Circuit Heat Exchanger)’로, 기존 전열관형 열교환기에 비해 크기가 10분의 1에 불과하고 효율은 90% 이상으로 매우 높다. 스테인리스나 초합금 등을 사용해 900℃ 이하의 고온, 3,000bar 이하의 고압 환경에서도 운전이 가능하다. 

실제 제작물을 보니 예상보다 크기가 아주 작다. 땅에 매설하거나 따로 박스를 추가할 필요 없이 수소충전기(디스펜서) 안에 넣으면 된다. 내부가 보이도록 한 면을 자른 샘플 단면을 보니, 촘촘한 구멍(유로)이 있는 얇은 금속판들이 겹겹이 붙어 하나의 금속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 기존보다 크기는 작으면서 효율은 90% 이상 높은 차세대 PCHE 열교환기.

“금속재료를 밀착시켜 불활성가스 분위기에서 높은 온도와 압력을 가해 접합한 제품이죠. 자제 제작한 진공 핫프레스 장비를 써서 만들었어요.”

에너진은 3,000℃ 이하의 고온에서 높은 압력을 가하는 ‘진공 핫프레스’ 장비를 갖추고 있다. 서로 다른 소재의 확산접합, 티타늄이나 첨단 세라믹 소결 제품 등을 만들 때 사용한다.

보통 핫프레스 공법은 요철 모양의 금형에 금속판을 찍어 자동차 보닛 같은 걸 만들 때 쓰는 기술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한쪽 방향에서 힘을 가해 제품을 성형하기 때문에 압축 중에 축방향으로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금형과의 마찰로 형태가 변형될 수 있고, 3차원 형상의 제작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HIP 가공이다.

HIP는 Hot Isostatic Pressing의 머리글자에서 왔다. 우리말로 ‘열간 등방압 성형기’를 뜻한다. HIP의 핵심은 ‘등방압’에 있다. 사면에서 동시에 높은 압력을 가해 제품을 성형하게 된다. 가스터빈 블레이드 같은 항공기 합금, 초합금 정밀주조품, 가스용 밸브, 카본 복합재 등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장비다.

“에너진의 HIP 제품은 주로 방산 쪽에 납품이 돼요. 최근에는 반도체 장비 부품의 제작에도 수요가 있죠. 금속 소재 내부에 기공을 최소화해서 높은 신뢰성을 갖게 하거나 세라믹 재료의 밀도를 높일 때도 써요. 2,000℃의 고온이나 2,000bar 정도의 압력을 일상적으로 다뤄왔다고 할 수 있죠.”

▲ 초고압에서 견딜 수 있는 각종 씰(Seal)과 밸브, 가압펌프 막대 등이 진열되어 있다.
▲ 최대 1만bar의 압력을 견디는 체크밸브.

압력은 멸균처리에도 활용된다. 생과일주스의 경우 멸균처리를 위해 온도를 높이면 맛이 변질되어 상품성이 떨어진다. 이럴 때 포장을 한 상태로 압력용기에 넣고 초고압으로 균을 압사시켜 유통기한을 확보하게 된다. 

“국내 햄은 열처리 후 진공 포장을 하지만, 유럽은 햄을 덜 익혀서 유통을 해요. 소고기만 해도 냉동보다 냉장으로 유통한 고기가 더 비싸잖아요. 이럴 때 균을 없애려고 초고압 처리를 해요. 여기에 필요한 HPP(High Pressure Processing) 장비를 만들어 해외로 수출하고 있죠. 에너진이 설립되기 전인 1990년대 말부터 저와 박훈재 박사(한국생산기술연구원)가 중심이 되어 이런 초고압 기술을 연구해왔고, 우리나라 초고압 기술 발전에 나름의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900bar 충전을 위한 수소충전설비

에너진의 출발은 2011년이다. 물론 그전부터 압력과 온도, 진공을 다루는 일을 해온 전문가들이 속해 있다. 황인기 전무, 이영철 상무, 이재원 연구소장이 대표적이다. 특히 황 전무는 1980년대 중반부터 이 분야에 매진한 전문가로 통한다.

에너진은 HIP 외에도 냉간 등방압 성형기(CIP; Cold Isostatic Pressing), 온간 등방압 성형기(WIP; Warm Isostatic Pressing)를 제작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12년 12월에는 최대 2만5,000톤의 힘으로 누르는(최대 압력 1,800bar) 분말성형 장비인 ‘하이브리드 CIP’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CIP의 내경이 1.4m, 높이가 2.5m로 당시만 해도 국내 최대 크기였다. 

▲ 에너진이 2012년에 세계 최초로 개발한 ‘하이브리드 CIP’ 장비.

▲ 높이 10m에 이르는 하이브리드 CIP의 프레임으로, 와이어 와인딩 방식으로 제작됐다.

“CIP는 온도에 의한 물성 변화가 필요 없는 제품을 상온에서 성형할 때 써요. 세라믹이나 금속 분말, 카본 파우더를 성형해서 고강도 복합재료를 만들 때 필요한 장비죠. 그에 반해 WIP는 200℃ 이상 온도를 올려서 물성의 변화가 필요한 제품을 만들 때 쓴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기, 전자 소재의 라미네이팅(적층) 공정에 주로 쓰고 있죠.”

에너진은 최근 미국의 전고체 배터리 개발사로 유명한 스타트업인 Q사에 개량된 WIP 장비를 납품했다. 고체 전해질을 쓰는 전고체 배터리는 에너지 밀도가 높고 화재 위험이 낮아 차세대 2차전지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WIP는 바로 이 전고체 배터리의 적층 및 전해질 침투 공정에 꼭 필요한 장비다.

▲ 전고체 배터리 제작에 꼭 필요한 온간 등방압 성형기(WIP).

여기까지는 기술적인 배경이다. 본론은 이제부터다. 에너진은 고압 기술을 바탕으로 수소충전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앞서 말한 열교환기(PCHE) 외에도 저장탱크, 압축기 개발이 포함된다.  

“수소저장탱크 시제품은 이미 개발한 것과 다름이 없죠. 같은 방법으로 초고압용기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기존 타입1 제품에 금속 와이어를 감아 내구와 안전성을 크게 높인 제품이죠. 제작 방식은 타입2에 가깝지만, 유리섬유나 탄소섬유 복합재로 감는 게 아니라 흔히 ‘피아노줄’로 부르는 금속 와이어를 탱크 둘레에 겹겹이 감아 편의상 타입1으로 분류를 하고 있어요. 미국의 피바테크(FIBA Technologies) 같은 곳이 경쟁사라 할 수 있죠.”

수소저장탱크를 고정하는 프레임도 같은 방식으로 견고하게 만든다. 실린더 좌우의 칼럼과 양단의 클로저를 누르고 있는 요크로 이뤄진 프레임 둘레를 금속줄로 단단히 감는 방식이다(에너진은 10여년 전에 이미 하이브리드 CIP의 몸체에 해당하는 높이 10m의 요크 프레임을 이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틀로 저장탱크를 고정해 세로로 층층이 쌓게 된다. 에너진은 올해 안에 한국가스안전공사(KGS) 인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제가 넥쏘 차주이기도 하지만, 현대차가 애초에 넥쏘의 저장탱크를 900bar 충전용으로 개발했다고 들었어요. 현재 충전소 사양이나 설비가 못 따라주기 때문에 700bar 충전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마저도 압축기 쪽에 문제가 많은 걸로 알아요. 왕복동식은 체크밸브와 패킹이 잘 망가지고, 다이어프램 방식은 판막이 자주 깨진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제안하는 방식은 전혀 새로운 겁니다. 마찰이 있는 패킹이 없고, 운전 중 체크밸브의 동작 횟수가 기존의 1,000분의 1 이하로 초고압임에도 무리 없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죠.”

황인기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크릴 칠판에 수소저장탱크를 그리기 시작한다. 차압을 통한 캐스케이드 방식으로 밸브를 여닫으며 중압, 고압탱크 순으로 수소 충전이 이뤄진다. 연속충전을 하거나 수소버스를 충전할 경우 탱크의 내부 압력이 크게 떨어져 압축기로 가압하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 이는 충전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원인이 된다.

▲ 황인기 전무가 벨로즈로 작동하는 신개념의 900bar 수소충전 시스템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원리를 말씀드리면 저장탱크 안에 스테인리스 벨로즈가 들어갑니다. 이 벨로즈 안에 수소를 채우는 방식이죠. 차량의 연료탱크에 수소를 충전하면 벨로즈가 동시에 수축하면서 압력의 차이를 없애줘요. 이렇게 하면 가압을 위한 대기시간이 사라지게 되죠. 충전이 끝나면 벨로즈의 이동거리로 수소 잔량을 계산해서 저장탱크에 다시 수소를 채우게 됩니다.”

탱크 내부의 금속 벨로즈가 압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수소를 충전할 땐 금속 벨로즈가 수축하고, 탱크에 수소를 채울 땐 주사기 노즐처럼 밀려나며 팽창한다. 발상이 신선하다. 저장탱크가 수소압축기의 역할을 겸하는 셈이다. 

▲ 수소압축기를 겸한 벨로즈 압축형 수소저장용기의 이미지.

▲ 와이어 와인딩 방식으로 개발한 에너진의 수소저장용기 이미지.

“유압을 써서 벨로즈를 밀어 단계별로 수소의 압력을 높이는 방식입니다. 통상 고압탱크에 860bar로 저장을 했다 700bar로 충전을 하는데, 553리터 용적인 피바테크사 저장탱크의 경우 테스트 압력이 1,050bar예요. 우리는 이걸 1,500bar로 높여 테스트한 다음 900bar 충전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할 생각입니다. 용기의 크기도 1,000리터급으로 두 배가량 키울 셈이죠.”

200bar의 압력은 큰 차이다. 압력이 높으면 차량 탱크 안에 더 많은 양의 수소를 채울 수 있다. 700bar 충전 시 넥쏘의 최대 주행거리가 600km라면, 900bar 충전 시에는 770km로 늘어난다. 에너진은 벨로즈가 내장된 수소저장탱크 겸 압축기의 개발을 내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세계 시장을 선점할 수소충전 기술개발

900bar 충전이 가능한 수소충전설비. 에너진의 목표는 여기에 있다. 그에 맞는 기술의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고 기술로드맵을 그린 회사를 찾기가 어렵다. 에너진이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각국이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 친환경차가 주목을 받고 있죠. 전기차 아니면 수소차 둘 중 하나인데, 전기차 또한 차량 수요가 늘면 대용량의 발전소가 필요하게 되고, 인프라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겁니다. 친환경차 시장은 결국 인프라 싸움이에요. 충전 편의성을 잘 갖춘 쪽이 시장을 크게 가져가겠죠.”

황인기 전무는 픽업트럭까지는 몰라도 그 이상 상용급으로 가면 충전시간 때문에 수소차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수소충전 인프라의 확충, 수소연료전지 가격의 안정화에 수소산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너진의 관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충전건에 쓸 결빙방지 노즐에 대한 특허도 이미 내놨다. 결빙의 원인은 수분에 있다. 건조한 공기를 불어넣어 접촉을 차단하기만 하면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재원 연구소장이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용접을 할 때 아르곤이나 이산화탄소 같은 실드가스를 쓰는 것과 같아요. 애써 공기를 데울 필요는 없죠. 드라이에어로 에어커튼을 치기만 하면 됩니다. 충전노즐을 새로 개발할지, 드라이에어를 불어넣는 결빙방지 장치만 따로 만들어 기존 노즐에 장착하는 쪽으로 갈지 고민을 하고 있죠.”

오토프레티즈(Autofrettage) 공법을 적용한 밸브나 파이프 제작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커먼레일(Common rail)이라는 디젤분사 장치를 만들 때 쓰는 공법으로, 커먼레일 엔진의 연료를 고압으로 분사하는 인젝터 라인의 파이프 수명을 길게 늘려준다. 

“파이프를 만들고 나서 하는 후처리 공정에 들죠. 냉간으로 금속 파이프 내부에 압력을 주면 압축응력과 팽창응력이 맞서면서 조직이 치밀해져요. 파이프라인에 인위적으로 스트레스를 줘서 내구성을 높이고 수명도 늘리게 되죠.”

이재원 연구소장은 수소안전을 위해 밸브나 파이프, 튜빙 시스템에 오토프레티즈 공법이 적용돼야 한다고 말한다. 듣고 보니 수소충전 사업의 전 부문을 아우르고 있다. 단단히 벼르고 준비했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 드라이백(Dry-bag) CIP로 상온에서 수분의 접촉 없이 원하는 모양대로 금속이나 세라믹을 성형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모험을 하고 있고, 전 이 모험이 성공할 거라고 봅니다. 수소만 한 대안이 없으니까요. 그동안 중국을 비롯해 해외시장의 동향을 유심히 지켜봤고, 이젠 들어가도 되겠다는 확신을 품게 됐죠. 우리는 지금 세계 수소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성공 가능성이 큰 모험에 나선 겁니다.”

황인기 전무가 힘주어 말한다. 

수소시장은 무르익지 않았다. 기대를 충족할 만한 기술의 개화를 기다리는 단계다. 문득 에너진이라는 회사가 그 단계를 훌쩍 건너뛰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예기치 않은 초대에 응했다 뜻밖의 만찬을 즐긴 기분으로 길을 나선다. 본사 옥상에 설치된 풍력발전기의 블레이드가 봄 햇살로 환하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