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소경제 성은숙 기자] 유럽 주요 국가에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보일러를 과감하게 퇴출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독일 의회는 가스보일러의 신규 설치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내년 1월부터 신규 주택지역에는 최소 65%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운영되는 난방시스템만 설치할 수 있다. 기존 주택지역에 들어서는 새로운 건물의 경우 도시의 크기에 따라 2026년 또는 2028년부터 이 같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독일은 넷제로를 목표로 하는 2045년까지 모든 난방시스템을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
오스트리아는 지난 2022년 6월 올해부터 신규 가스보일러의 판매를 금지하도록 했다. 영국은 두 단계에 걸쳐 화석연료 사용 보일러를 줄여 나갈 계획이다. 2025년부터는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 가스보일러의 설치를 금지하고(1단계), 2035년부터는 보일러를 교체하는 경우 유류·가스보일러 설치를 금지한다(2단계). 2035년부터는 보일러 교체 시 반드시 히트펌프 등 저탄소 보일러로 교체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는 최근 기존 가스보일러 금지 방침 대신 히트펌프 확대로 방향을 틀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9월 25일(현지시간) 국가 생태계획위원회를 열고, 2027년까지 100만 대의 히트펌프를 생산하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생태계획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들 국가는 화석연료 보일러 금지와 히트펌프 등 저탄소 보일러 확대뿐만 아니라 수소보일러 보급에도 적극적이다.
히트펌프와 수소혼입
영국난방온수협회(HHIC)는 2021년 2월 발간한 보고서 ‘수소 가전(Hydrogen Appliances)’에서 난방 분야의 탈탄소화를 위한 주요 전략으로 히트펌프 확대, 수소가스 그리드로 전환 등 두 가지를 꼽았다.
히트펌프는 특정 장소의 열(heat)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 사용하는 기계(pump)를 말한다. 열원(지열, 공기열, 수열 등)에 따라 구분되며, 각각의 특징이 다르다.
지열히트펌프는 계절에 상관 없이 안정적으로 구동되지만 높은 초기 비용과 설치 장소 제약 등의 한계가 있다. 공기열히트펌프는 장소에 제약 없이 설치할 수 있고 경제적이지만 계절적 한계성이 있다. 수열히트펌프는 짧은 설치기간과 낮은 유지비가 장점이지만 초기 비용이 높다는 단점이 있다. 히트펌프는 화석연료 사용 보일러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고 구동비용이 저렴하며, 환경오염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가 올해 7월 내놓은 ‘유럽 히트펌프 시장동향 및 진출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화석연료 보일러는 1kWh당 0.2kgCO2eq의 온실가스배출량을 기록하는 반면 히트펌프로 발생하는 온실가스배출량은 0.07kgCO2eq(지열원)~0.08kgCO2eq(공기열원) 정도다.
향후 기술의 발전으로 2050년 히트펌프의 온실가스배출량은 0.01kgCO2eq/kWh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독일 연방정부는 히트펌프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2030년까지 히트펌프 설치 목표를 상향 조정하고, 설치보조금을 지원한다.
영국 정부는 2022년 4월부터 화석연료 사용 보일러를 히트펌프나 바이오매스 보일러로 교체하는 경우 보조금을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또 2022년부터 2027년 3월까지 히트펌프, 태양광 패널 등 에너지 효율이 높은 제품 구매 시 설치 부가세를 면제하는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22년 11월 특별보고서 ‘히트펌프의 미래(The Future of Heat Pumps)’는 2021년 전세계히트펌프 판매량은 약 15% 증가한 것으로 보고했다. IEA는 EU의 히트펌프 연간 판매량이 2021년 200만 대에서 2030년 700만 대까지 증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 히트펌프가 2030년에 글로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소 5억 톤까지 줄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추정했다. 이는 오늘날 유럽의 모든 자동차의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맞먹는다. 하지만 히트펌프는 화석연료 보일러 대비 높은 설치 비용, 넓은 설치 면적, 전문 인력 부족 등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또 다른 전략인 수소가스 그리드로 전환하는 전략에는 기존 도시가스 배관망에 수소를 혼입해 공급하는 방법, 수소 100% 공급 시 간단한 변환을 거쳐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설치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 중 도시가스에 수소를 혼입해 공급하는 방법은 전국 곳곳에 연결돼 있는 배관망을 이용해 각 가정까지 수소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는 전국적이면서 효율적인 방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소 전용 배관망을 구축하는 것에 비해 수소 유통의 경제성 제고 측면에서 현실적인 방안으로 여겨진다. 한 보일러업계 관계자는 “수소 전용 배관망의 경우 1km당 약 15억 원의 비용이 발생해 빠르게 구축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한국가스공사는 ‘천연가스 배관의 단계적 수소배관 전용(轉用)화 추진’ 보도자료에서 유럽 28개국의 EHB(2022) 보고서를 인용, “2040년까지 유럽 통합 수소 배관망 5만3,000km를 구축하는 데 이미 사용 중인 천연가스배관을 60% 이상 전용할 경우 투자비용을 약 75~90% 절감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수소가 혼입되는 만큼 도시가스 사용량을 줄여 온실가스 발생량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효과도 있다.
다만 크기가 작고 가벼운 수소의 특성으로 수소취성(Hydrogen Embrittlement, 수소가 금속 내부로 확산돼 금속을 파괴시키는 현상), 수소 누출, 도시가스와 수소의 분리현상 등이 발생할 수 있다. 때문에 도시가스 배관망과 사용기기에 대한 수소 호환성·안전성 검증이 필요하다.

해외에서는 도시가스 수소혼입 추진을 위한 실증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Hydeploy 프로젝트’가 있다. 도시가스에 수소 20%를 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총 3단계에 걸쳐 배관, 사용기기에 대한 안전성 실증을 진행해왔다.
미국의 ‘HyBlend 프로젝트’도 있다. 2020년 말부터 천연가스 배관의 수소 호환성, 수명 분석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전력기업인 E.ON은 2021년 10월 천연가스 배관에 단계적으로 최대 20%의 수소를 혼입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당시 E.ON은 보도자료를 통해 “실험실 테스트(Laboratory tests) 결과 가정 내 많은 가전제품들이 최대 30%의 수소 혼입에도 작동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유럽 업체를 중심으로 수소 100% 보일러, 보일러 부품 등의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추세다. BDR Thermea, Viessmann, Worcester Bosch, BDR Thermea 그룹의 Baxi, Orkli, Bekaert 등이 대표적이다.


안전성 확보 중요해
수소공급 배관망이 전국적으로 안전하게 구축되면 수소 보일러 등 수소 사용 가능 제품의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다. 이때 특히 강조되는 것은 안전성 확보다. 수소의 특성 때문이다.
국내 정부는 도시가스 수소혼입 실증을 추진, 선제적으로 안전기준을 마련할 예정이다. 산업부는 ‘2026년 도시가스 수소 20% 혼입 상용화’를 목표로, 지난해 민관 합동으로 ‘도시가스 수소혼입 실증추진단’을 구성했다. 이를 통해 도시가스 배관과 사용기기의 수소 호환성·안전성에 대한 단계별 실증을 추진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올해 5월 ‘도시가스 배관망 수소혼입 간담회’를 개최해 산학연 전문기관과 함께 수소혼입 과제 착수회의를 열고 현재 사용 중인 도시가스 배관에 최대 20%의 수소혼입을 목표로 안전성 검증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번 실증사업은 국민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스시설(보일러, 가스레인지 등)을 포함한 수소혼입 전주기(제조-공급-사용) 안전성 검증 등 기술개발에 총 280억 원을 투자해 2026년까지 필요한 안전기준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다.
해당 R&D 과제는 △‘수소 혼입 도시가스 배관 수소취성 평가 및 수명예측 안전기술 개발·실증’ 분야인 일반형 과제(6월 14일 협약체결) △‘도시가스 배관망 수소혼입 전주기 안전성 검증 기술개발·실증’ 분야인 통합형 과제(6월 19일 협약체결)로 구성됐다. 한국가스안전공사(KGS)와 예측진단기술이 각각 주관·연구개발기관으로서 참여기관과 협업하여 3년간 실증 연구를 수행한다.

최근 일반형 과제 참여기관 중 한 곳인 경동도시가스는 도시가스 배관망 수소혼입 안전성 검증 실험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서정태 경동도시가스 과장은 지난 9월 14일 ‘H2 MEET’의 ‘도시가스 배관망 수소혼입 전주기 안전성 검증 기술 개발’ 세미나에서 도시가스 공급시설의 수소영향성 실증 결과 배관과 연결부, 계량기, 매몰형 밸브에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정압기의 경우 미세누설 현상이 있었으나 누설 원인 분석 후 누설 부위를 분해해 테프론으로 강화 조치한 결과 누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번 실험은 믹싱설비와 유동설비 구축 시 비용 증가와 사고 발생 우려로 수소 100%로 유동 상태가 아닌 기밀가압 상태에서 진행됐다는 제한점이 있다. 또 실증실험에서 기존 도시가스 배관이 아닌 신규로 제작한 배관을 사용했으며, 공급배관(PLP, PE 배관)의 수소 노출 시간을 3개월, 12개월로 설정했다는 한계점도 있다.
서정태 과장은 “1년 정도 연속적인 기간에 그 영향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며, 장기적인 영향은 이번에 참여하고 있는 국책과제에서 면밀히 살펴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통합형 과제는 세 가지 세부 과제로 구성됐다. 세부 1과제는 ‘주택용·산업용 연소기·가스기기 연소성능 안전성 검증 안전기술 개발’이며, 세부 2과제는 ‘비금속 재료 수소침투 적합성 평가 및 가스유량 오차 검증 안전기술 개발’이다. 세부 3과제는 ‘도시가스 배관망 수소혼입 안전성 평가·실증 및 안전기준 개발’이다.
수소보일러에는 몇 가지 기술적 난제들이 있다. 지난 9월 열린 ‘H2 MEET 2023’의 ‘리더스 서밋’에서 임재범 경동나비엔 팀 리더는 발표 자료를 통해 △천연가스(메탄)에 비해 빠른 연소 속도로 인한 역화 위험 상승 △연소한계 범위 증가와 낮은 최소점화에너지로 폭발 위험 증가 △천연가스(메탄)에 비해 높은 화염온도로 인한 열에 의한 NOx(Thermal NOx) 생성 증대 등을 언급했다. 세부 1과제에 경동나비엔과 귀뚜라미보일러가 참여해 수소보일러 실증을 진행할 예정이다.
보일러업계 관계자는 “수소는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로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며, 500℃ 이상의 높은 점화온도로 자연적 발화가 극히 드물지만, 일반 사용자에게 수소 이미지는 수소폭탄 등 무척 위험한 것으로 각인돼 있어 안전성에 대한 확실한 결과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최근 있었던 영국 수소마을 대상지 휘트비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도 1970년대 가스연료화 정책 추진 시 눈에 보이는 석유, 석탄연료를 사용하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스를 사용하게 되자 비슷한 진통을 겪은 적이 있다”라며 “국민의 불안감은 짧은 시간 내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인 만큼 안전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개발과 이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며, 확실한 결과를 가지고 꾸준히 설득해 여론을 형성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 보일러업계, 연구개발 박차
국내 보일러사는 수소의 특성과 연소 관련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고,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경동나비엔은 이미 영국에서 판매 중인 콘덴싱 가스보일러에 ‘수소 20% 레디 인증’을 받았다. 수소를 혼입한 가스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는 뜻이다.
임재범 경동나비엔 팀 리더의 발표에 따르면 경동나비엔은 인하대학교, 카이스트와 수소 100% 보일러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1차 예비 테스트를 완료했다. 또한 수소 100% 공급 시에도 현재의 보일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전환 키트(burner assembly, flame detector, control box)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영국 버밍엄 국립전시센터에서 개최된 ‘인스톨러 쇼(Installer Show) 2023’에선 100% 수소를 연료로 하는 콘덴싱 보일러를 선보였다.

아울러 영국 에너지규제기관 오프젬(OFGEM) 등이 추진하고 있는 약 2,000개의 건물에 천연가스 대신 수소를 주입하는 ‘수소마을 시범사업(hydrogen village trial)’에 적극 참여 중이다. 이 시범사업 대상지역으로 영국 북동부 티스사이드에 있는 레드카(Redcar)와 북서부 엘즈미어포트의 휘트비(Whitby)가 언급됐는데, 지난 7월 휘트비는 제외됐다. 영국 공영방송 BBC 등에 따르면 지역 주민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알려졌다.
귀뚜라미그룹의 귀뚜라미홈시스는 지난해 9월 ‘귀뚜라미 수소 보일러’, ‘귀뚜라미 H2보일러’, ‘거꾸로 타는 수소보일러’, ‘거꾸로 타는 H2 보일러’ 상표권을 출원했다.
린나이코리아는 일본 본사와 협업해 수소 제품을 연구개발하고 있다. 지난 2022년 5월 일본 린나이는 세계 최초로 가정용 온수기용 100% 수소 연소 기술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